16년전의 일기

16년전의 일기..

16년 전의 일기장을 꺼냈습니다.
회색 갱지 100원짜리 공책엔
삐뚤삐뚤한 글씨와,
그림으로 그린 날씨와,
여섯살의 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.,,,,,

우리 옆집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애가 살아요. 이름은 승아에요. 우린 나이
도 같구, 다니는 유치원도 같구요, 생일도 비슷해요. 우리가 태어나던 날,
우리 아빠들은 저 골목 앞의 대성상회에 가서 술을 같이 드시고는 나중에
우리 그냥 결혼시키기로 하셨대요.
우린 어렸을 때 부터 매일 같이 놀았어요. 빨간색 바께쓰에서 목욕도 같이
하구요, 걸음마도 같이 배웠대요. 아기일 때 사진을 보면 승아가 제 팔을
깨물고 있고 저는 그래도 뭐가 좋은지 히~ 하고 웃고 있는 사진이 있어요.
울 아빠가 이걸 보구는,
" 너 승아랑 결혼 시키면 안되겠다. 완전히 공처가로 살 꺼 같구만...."
라구 그러셨어요. 난 공처가가 뭔지 몰라서 계속 물어봤는데, 그냥 계속 씨
익 웃으시면서 안가르쳐 주세요.

우린 유치원 갈때도 같이가요. 저 쪽 뚝산오르는 길 옆으로 자갈이 많은 길
을 계속 따라 걸으면 유치원이 나오는데요, 원래는 10분만 가면 되는데 우
린 가면서 막 때리고 도망가구, 가위바위보들보들개미똥꾸멍멍이가똥을쌌대
대요~! 하면서 가위바위보 해서 한걸음씩 가기두 하구, 원반같이 생긴 유치
원 빵모자를 날리기도 하구 그래서 매일 지각해서 혼나요. 유치원 낮잠시간
에도 잠자는 척 하면서 몰래 목 뒤를 손가락으로 찌르고
" 어느 손가락으로 찔렀게?"
하구 놀다가 선생님한테 들켜서 장난감 상자 치우는 벌도 많이 받았어요.
치우면서도 승아랑 장난감 던지면서 놀다가 선생님한테 무지 혼난 적도 있
답니다. 혼나면서도 우리는 서로 보고 키득키득 웃었어요.

여름이면 승아네 집에서 오렌지 가루를 물에 녹인걸 얼려서 샤베트 해 먹고
나가서 해 질때까지 고무줄 하고 놀았어요. 고무줄은 제가 승아보다 더 잘
해요.
" 적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, 낙동강.."
라구 노래 부르면서 고무줄을 머리 위까지 있는걸 밟아서 땅에 찍고 다시
도는건 우리동네에서 저밖에 못했어요. 우리 동네 남자애들은
" 쟤는 남자애가 고무줄 한대요~~ 쟤는 승아 남편이래요~~ "
하고 놀리긴 했지만 제가 고무줄을 하니까 고무줄 자르고 도망가는건 못했
어요. 그래서 여자애들도 고무줄 할때면 항상 절 끼워줬어요. 전 고무줄 하
는 것보다도 승아랑 놀 수 있다는게 더 좋았구요.

전에 유치원이 끝나고 다시 자갈길을 걸어오는데 승아가 업어달라고 그래서
비틀비틀 거리면서 업고 집에 오는 길이었어요. 승아가 나보고 귀에 대고는
요,
" 우리 나중에 결혼하는거다~. 응?"
하고 물어봤어요. 전 막 좋다구 그러구 싶었지만 아빠한테 전에 들은게 있
어서
" 우리 아빠가 너랑 나랑 결혼하면 안된대....그럼 나 공처가 된대."
" 공처가가 뭔데?"
" 나두 몰르는데, 머 괴물이나 그런걸로 변신하는거면 어쩌지?"
" 그래도 결혼 하자. 응? 응? 응? "
" 그래~~~"
하고는 내려서 둘이 폴짝 폴짝 뛰면서 왔어요. 그날 전 몰래 우리집 담벼락
에다 전에 땅따먹기 그리다가 남은 석필로
" 승아 ♡ 진석 "
하구 크게 쓰고 왔답니다. 나중에 승아가 보구 이거 누가 이런거냐구 막 그

지만 난 몰르는 척 하구 그냥 있었어요.
그런데 어느날부턴지 모르는데요, 승아가 이상해졌어요. 얼굴도 이상하게
하얗구요, 전에는 저랑 달리기도 잘 했는데 이젠 조금밖에 못 뛰구요, 유치

낮잠시간에도 전엔 저랑 자는 척 하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그냥 자요. 집에
올때두 자꾸 쉬었다 가자구 그러구, 고무줄도 조금 하다가는 집에 그냥 들
어가
요. 그러면 저는 더 하는 척 하다가 그냥 집에 엄마가 불른다구 가서는 승
아네
가서 놀아요. 근데 전엔 하루 종일 승아네서 놀아도 승아 엄마가 아무말도

하셨는데 요새는 조금 놀면
" 승아 힘들어서 안돼. 이제 집에 가야지?"
하고는 절 보낸답니다. 전 아줌마가 무지 원망스러웠어요.
그 날은 오랜만에 유치원에서 초코파이 간식이 나오는 날이었어요. 우리는
초코파이를 간식 시간에 안먹구 가방에 넣어가지구는 집에 오면서 먹었어요
. 그 날따라 승아도 쉬었다 가자구 안그러구 괜찮아 보여서 오랜만에 망까
기를 하기로 했어요. 그래서 잘 세워지는 돌을 찾아서 세워놓구는 맞추기를
하는데 잘못해서 승아가 돌을 밟다가 넘어졌어요. 그래서 무릎이 까졌는데
피가 막 났어요. 계속 피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나와서 승아두 울구 저두 피
가 무서워서 같이 옆에서 엉엉 울었어요. 저희가 우는 소리를 들은 우리 엄
마랑 승아네 엄마랑 나오셔서는 두 분이 뭐라구 얘기하시드니 승아네 어머
니는 승아를 업고 막 골목 저쪽으로 뛰어가시구 전 엄마가 데리고 집에 들
어 가셨어요. 그리고는,
" 진석아, 이제 승아랑 놀면 안돼."
" 왜요?"
" 승아가 아프단다. 그래서 놀면 힘들어서 안돼."
" 아녜요. 오늘은 괜찮았단 말예요."
" 하여튼 이젠 놀지마라."
그날 전 승아랑 놀겠다구 엄마한테 대들다가 회초리로 맞았어요. 전 슬퍼서
엉엉 울었구 엄마두 뭐가 슬프신지 같이 우셨어요.
그날 이후로 전 승아랑 한번도 놀지 못했답니다. 유치원 갈때두 승아 엄마
가 승아를 데려다 주구요, 올때두 그러구요. 가끔 승아네 집 앞에서
" 승아야, 놀자~"
하면 승아 엄마가 나와서
" 이제 승아랑 놀면 안돼요. 어서 가거라."
그러면서 한번두 승아랑 놀게 못하구요. 승아랑 안노니까 고무줄도 재미가
없어서 한 번두 안했어요. 유치원 갔다 올때두 이젠 혼자서 와요. 가을이라
길가에 코스모스 꽃이 막 피었는데 그게 흔들흔들 거리는게 날 놀리는 거
같아서 막 뛰어왔어요. 그날 우리집 담벼락에 전에 쓴 " 승아 ♡ 진석 " 이
라는 글씨가 다 지워져 버려서 석필로 계속 계속 쓰고 또 썼어요. 유치원
가다가 승아가 이걸 보겠지 하면서 석필이 다 닳아 없어질때까지 쓰고 또
썼어요.

그러던 어느날, 일요일이었어요. 갑자기 엄마가 전에 사고는 한번도 입지
않으신 한복을 입으시구요, 저한테는 제가 제일 아끼는 옷을 입으라구 하셨
어요. 그래서 전 태권V 티셔츠하구 멜빵바지하구 입었어요. 그리고 절 데리
고 우리동네 앞에 있는 교회로 데리고 가셨어요. 가시면서 계속 우셔서 엄
마 왜그래 하구 물어볼려구 그랬는데 엄마가 또 대답 안해주실꺼 같아서 그
냥 따라갔어요.
교회 안에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어요. 전 그런거 처음봐서 어
리둥절 해 있었는데 엄마가 저 보구
" 진석아. 승아...이제 먼 나라로 갔단다. 저기 가서 인사하고 오렴."
하셨어요. 그래서 전 저 앞에 나무로 만든 조그만 침대같이 생긴 곳으로 갔
더니 그 안에 승아가 자고 있었어요. 그래서 전 승아한테 말했어요.
" 승아야. 나 나중에... 공처가 되두 좋으니까 우리 결혼하자. 응? "
그랬어요.그러니까 옆에서 승아 아줌마가 막 우시면서
" 진석아...이제...승아 다시 못봐....승아 이제 먼 곳으로.."
하고는 말을 다 못하시고 우셨어요. 전 승아 올때까지 우리동네에서 기다릴

라구 말 할려구 그랬는데 승아를 오래 못보게 된다니까 갑자시 슬퍼서 엉엉
울었어요. 승아 어머니두 절 안고는 계속 우셨어요.
....
오늘은 승아의 20번째 생일입니다. 전 승아의 무덤에 장미 20송이를 놓고
집에 오는 길입니다. 동네도 많이 바뀌고 자갈길도 아스팔트 길로 바뀌었지
만 길가에 핀 코스모스는 여전히 한들거리고 있었습니다.
승아가...많이 보고 싶습니다.....

'좋은글 모음' 카테고리의 다른 글

푸른 길잡이란 물고기를 아십니까?  (4) 2001.05.16
악마와의 계약  (6) 2001.05.07
  (2) 2001.05.07
연수의 결혼식  (2) 2001.05.05
날 위해서  (0) 2001.05.05
내가 너의...  (4) 2001.05.05
잃어버린 우산  (0) 2001.05.05
누구나 좋아하는 사람  (2) 2001.04.26
우정을 잊지 말자  (0) 2001.04.26
가까이 있는 사람 사랑하기  (0) 2001.04.26